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문단 편집) == 음악 성향 == >'''"피아노는 타악기다."''' 초기에는 그야말로 '앙팡 테리블'이라는 수식어가 딱 어울릴 정도로 도발적이고 대담한 작풍으로 수많은 논쟁을 유발했는데, 특히 자신의 주요 악기였던 피아노곡에서는 지금도 처음 듣는 이들에게 꽤 충격적일 정도로 불협화음의 난타, 복잡한 조바꿈, 대담한 화성 진행이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피아노 협주곡 2번(프로코피예프)|피아노 협주곡 2번]]의 경우는 미친 난이도에 정신나간 화성전개로 초연 당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더 낫다"는 평까지 들었다~~고양이 울음소리는 원래 좋다~~[*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 난이도 끝판왕 수준의 곡으로, 심지어 프로코피예프 본인도 제대로 치지 못했다! 1930년도에 가졌던 공연에서 프로코피예프 본인이 피아노를 연주했는데, 이때 제대로 악보를 따라가지 못해서 연주를 완전히 망쳐버렸을 정도. 다만 후술하는 것처럼 이 곡의 초연 당시의 악보는 화재로 유실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2번 협주곡은 1923년에 사실상 새로 작곡된 곡이다. 초연 당시의 2번 협주곡은 현재 연주되는 2번 협주곡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낭만주의 시대에 자주 쓰인 분산화음, 노래하는 듯한 레가토 등은 그의 작품에서 대놓고 무시되고 있으며, 낭만성과 거리가 먼 타악기적인 울림과 선율 대신 음향과 구조에 주력하는 그의 피아니즘은 20세기 피아니즘의 대표격으로 인정받고 있다. ||[youtube(XYFpfFsbshk,width=400,height=240)]||[youtube(KkXyE9CZ_lk,width=400,height=240)]|| || 토카타 Op.11(1912) || 악마적 암시 Op.4 (1910) || * 초기의 대표적인 피아노 곡들이다. --영상에 나오는 악보들을 보고 있자니 저게 음표인지 가시덤불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이와 같은 도전적이고 대담한 수법은 피아노 분야 한정으로 그의 음악인생 내내 지속됐으며, 그 덕분에 프로코피예프는 [[라흐마니노프]]와 더불어 피아노 분야에서 러시아 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다. 인기 측면에서는 귀에 친숙하게 들리는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이 좀더 앞서지만 독창성과 음악성 측면에서는 단연 프로코피예프가 돋보인다. 그가 남긴 9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시대적으로 모차르트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쇼팽의 2, 3번 소나타,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B단조 이후 가장 중요한 피아노 소나타 트랙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전쟁소나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6, 7, 8번의 세 소나타는 당대에 필적할만한 작품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관현악곡에서는 다소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일반적으로 프로코피예프의 관현악법은 스트라빈스키[* 초기의 작품인 발레음악 '불새'나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로 이미 당대 최고의 관현악법을 구사했다는 평을 받았다.]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쇼스타코비치의 일사불란하면서도 효율적인 관현악법에 비해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후배인 쇼스타코비치가 외려 보수적이고 모험수를 두지 않는 관현악법을 구사했다면,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는 다소 급격한 단절감을 내비치는 의외성 있는 관현악법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색다른 음향 효과를 도출하여 자신의 오케스트라 운용에 논리성을 얻어내는 스트라빈스키와 달리, 프로코피예프의 경우 '''정말로 악기법에 미숙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허점들을 이따금 드러낸다. 명백히 음량이 부족한 악기[* 특히 피아노나 하프 등 보조악기들]들에 중요한 대목을 맡기면서 금관에 대적시킨다든지, 지나치게 우연적인 효과를 얻어낸다든지 하는 부분이 결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러한 거친 관현악법이 나름 개성으로도 작용하여, 곳곳에서 드러나는 익살과 의외성 등은 프로코피예프의 관현악곡만이 갖고 있는 매력으로 꼽히기도 한다. 스키타이 모음곡(Scythian Suite, Op.20)과 어릿광대 발레 모음곡(Chout Suite, Op.21)으로 대표되는 프로코피예프의 초기 관현악곡은 선배 스트라빈스키의 초기작품과 마찬가지로 불협화음과 금관악기/타악기의 전폭적인 사용을 통한 강렬한 음향과 역동적인 리듬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이런 특징은 그의 후기 작품에서도 일정 부분 유지되고 있다. 다만 흔히 '고전 교향곡'으로 불리는 교향곡 1번(Op.25)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Op.19) 등에서는 나름 신고전주의적인 수법을 실험하기도 했는데, 1920년대의 스트라빈스키처럼 직접적으로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전향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의 관현악곡들이 좀더 형식미와 정돈된 수법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나름 신고전주의를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프로코피예프는 철저한 '반낭만주의자'였지만 고전기의 작품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애정을 갖고 있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 시절에 고전주의를 자신의 음악의 중요한 모토 중 하나로 삼기도 했다.]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의 경우 대중적으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프로코피예프에 대해 교향곡보다는 극음악에서 장점을 발휘한 작곡가라고 보았다.] 나름 프로코피예프 자신이 애정을 갖고 작곡에 임한 분야였다. 특히 심기일전하여 작곡한 후기의 교향곡들(5-7번)은 상당한 음악성을 가진 말년의 걸작으로 평가되며, 소련 음악의 성과로 받아들여진다.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곡이나 교향곡 외에도 오페라나 발레 같은 무대 작품에 상당한 관심과 열정을 쏟은 것으로 유명한데 문제는 공연운이 영 따라주지 않았다는 것. 이 분야에서는 남긴 작품이 꽤 많은데도 거의 대부분이 초연에서 망하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초연조차 못하고 한참 뒤에야 성사되었다.[* 외국인(러시아인)이라는 불이익도 감안해야 한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6인조]]의 평범한 수준의 작품이 프로코피예프보다 더 각광을 받는 바람에 프로코피예프가 꽤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프로코피예프 자신도 이들 대작이 초연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관현악 모음곡 등 연주회용 작품으로 많이 [[리메이크]]를 해놓았고, 교향곡 3번과 4번(초판)도 각각 '불의 천사'와 '방탕한 아들'의 음악 소재를 가지고 쓰여졌다. 소련 귀국 후에는 그 이전에 보여준 신고전주의 성향과 스탈린의 철권 통치 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도가 겹쳐서 좀 더 평이한 작풍을 보여줬는데, 간간이 그 작풍이 개인적인 의욕과 합쳐져 빚어낸 명작들도 있기는 하지만 상당수는 강철 대원수의 [[애널써킹]]용으로 작곡된 탓에 그의 명성에 먹칠만 하고 있는 저퀄 작품이 되고 말았다. 특히 이 시기 작곡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는 노골적으로 스탈린과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무시당하고 있다. 그와 소련 음악계의 투톱을 이루던 쇼스타코비치 역시 이러한 어용 작품 생산을 해야 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체제가 출범할 때부터 러시아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름 익숙해져서 이런 저급한 작업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한 프로코피예프는 이런 작업에 익숙하지 않았고, 결국 간부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어야 했다. 이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는 결국 프로코피예프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쳤는데,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별 문제가 없던 그의 건강은 낙상사고를 겪고 스탈린 정권의 탄압과 검열이 심해지면서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말년에는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결국 61살이라는 다소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아야 했다. 생애 항목에 있는 것처럼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깨닫자 '나는 더 많은 음악을 써냈어야 했다'며 한탄했다고 하는데, 이게 말뿐만은 아닌 게 실제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많은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래식 팬들 입장에서 상당히 안타까운 대목. 이렇듯 대작곡가의 말년에 어울리지 않는 굴욕으로 인해 그의 말기 작품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평가가 많지만, '당의 요구이기는 하지만 선율미 있는 음악을 더욱 추구하게 됨으로써 나름의 의미가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런 식으로 말년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을 옹호하고 있다. 쇼스타코비치 역시 '말년에 이르러 프로코피예프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듯했다'며 묘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유럽에서의 현대음악이 점점 더 전위성을 추구해가면서 걸출한 조성음악 작곡가들이 점점 증발해갔는데, 이러한 중에서도 말기의 프로코피예프는 조성을 갖추면서도 뛰어난 작품성을 잃지 않은 몇 안 되는 거장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들의 대부분이 해금되어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소련 해체|소련 붕괴]] 후에는 초기 작품들이나 무대 작품들의 적극적인 음반/영상물 출반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이 분야에서도 뒤늦게나마 명성을 얻고 있다. 20세기 작곡가들 중에서 흔치 않은 인기 작곡가[* 현재에도 미국에서는 프로코피예프가 가장 잘 연주되는 20세기 작곡가 중에는 무조건 상위권에 속한다.]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러한 대중적 수요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